<WATCHMEN> - 당신은 왜 이 영화를 보았는가 TRAVELS

















(영화에 대한 리뷰라기 보다는,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에 대한 글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책장에 꽂아둔 원작을 잊고 가능한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고자 노력했다. 변형과 재해석의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 흔히 그러하듯이 원작을 망쳐 놓았거나, 나름대로 만족할 만 하거나, 혹은 예상과는 달리 훨씬 낫다는 느낌을 받았다 할 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모와의 비교를 통해 얻은 감상일 뿐 자식의 성취 그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르가 바뀌는 순간, 그것은 원작으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또 다른 작품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잘 만든 축에 속한다.

  '코미디언'의 죽음에서 이어지는 오프닝 크레딧은, 비록 원작을 읽은 독자를 위한 팬서비스로 가득하긴 하지만, 한눈 팔지 않고 주의깊게 지켜본다면 원작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도 본격적인 전개로 접어들기에 앞서 어떤 식으로 현실의 역사를 비틀어 세계관을 구축해 놓았는지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제공한다. 

  감을 못 잡았다고?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영화관에 늦게 들어왔거나, 흘린 팝콘 부스러기를 줍느라 바빴거나, 옆자리 애인과 숙덕거리느라 정신이 없었거나, 혹은 미국 현대사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거나.

  일부 팬들은 영화 <와치멘>을 놓고, 팔다리를 잘라먹었다느니 원작을 강간했다느니 하는 혹평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런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전체적인 대사량은 원작에 비한다면 터무니없는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몇 컷 또는 몇 페이지를 할애하여 보여주었던 장면들을 한 마디 말로 간단히 요약해버린 부분도 적지 않다. 사건이 중심이 되는 히어로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 비교적 비중이 적은 주변 인물들의 흔적은 완전히 없애거나 팬들만 알아볼 수 있는 수준으로만 남겨 두었고, 그래픽 노블로서의 연출 중에서 영상으로 표현하기 버거운 부분은 과감히 잘라내버렸다. 분량으로만 따진다면 총 12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원작에서 서너 개의 에피소드가 통째로 생략된 셈이며,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는 유사하되 결말의 양상은 꽤 다르다.

위대한 원작을 어머니로 둔 거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그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와치멘> 역시 많이 부족해보이는 자식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리고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다만 영화의 성격만을 제대로 알고 본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건대, <와치멘>은 소문 만큼 불친절한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로서 적합한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것을 버린 대신, 영화로서의 <와치멘>은 그만큼의 완성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다시 말해 원작의 열성적인 팬들이 <와치멘>을 가리켜 사생아라 부른다거나, 이것저것 잘라먹다보니 인물의 성격이나 동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그저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먹기 힘들다는 이유로 혹평을 가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실 이것은 영화를 이해하고 그 함의를 읽어내는 관객 개개인의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독 한국의 배급사들만이 그런 관행을 고수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뭔가 새로운 영화가 개봉하기만 하면 작품의 본질과는 멀어도 한참 먼 수식어 따위를 잔뜩 붙여서는 어떻게든 잘 나가는 장르인 척 위장한 채로 홍보를 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보인다. 팸플릿만 모아놓고 본다면, 한국에서 개봉하는 영화의 90%는 블록버스터급 액션 아니면 로맨틱 코미디인 것은 아닐까 싶을 지경이다. 꿈과 환상으로 가득한 동화 속 모험인 것처럼 포장되었던 <판의 미로>가 그러했다. 아이를 데리고 극장에 온 부모들은 술병으로 사람 얼굴을 으깨고 괴물이 요정을 우적우적 씹어먹고 사람 입이 귀밑까지 칼에 주욱 찢기는 장면을 보고 기겁을 했을 것이다. 

  <와치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애초에 19세 미만 관람불가 등급인 덕분에 아이들은 볼 일조차 없었다는 것 정도이다. 나름 잘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듣는 다른 히어로물, 이를테면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멘> 시리즈를 기대하고 표를 구입한 관객이라면 영화가 끝날 무렵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무슨 연극도 아니면서 주절주절 말은 쓸데없이 많고, 160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 중에서 질이야 어쨌든 액션의 양은 터무니 없이 적다. 메뉴에 적힌 설명만 보고 달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정작 입에 넣고보니 맵고 짠 맛이었다면, 맛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첫 술은 뱉어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수준을 놓고 운운할 문제가 아니다. 수준이 아닌 태도의 문제이므로.

  영화뿐만이 아닌 모든 장르를 통틀어, 작품에 대한 감상자의 '취향'과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는 항목이다. 때로 해당 장르에서 수작이라 일컬어지며 비평계는 물론 대중에게서도 호평을 받은 작품이 어느 개인에게는 아무런 재미도 선사하지 못 하는가 하면, 여기저기서 그야말로 '쓰레기'란 평을 받은 작품에 강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의아해 할 일도 아니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도 아니다. 사람의 취향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다만 서로 다른 두 가지 기준을 하나인 양 혼동하여 혼용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영화의 그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품위를 위해서 말이다. 

  어쨌거나 <와치멘>은 데이트의 일환으로 별다른 계획 없이 영화관을 찾은 알콩달콩한 커플에게 머리를 비운 채로 눈과 귀만을 즐겁게 해 주길 바라는 관객에게 권할 만한 영화는 아니다. 기실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영화 역시 그것을 볼 준비가 된 사람에게 가장 많은 것을 주는 법이다. 좀 더 고민하고,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은 다음에 어떤 표를 살지 선택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당신의 돈 8000원과 120분 안팎의 시간, 그리고 정신건강을 위해서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동안, 차라리 몇십분 쯤 더 넣어서 세 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으로 내놓았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반지의 제왕>도 겪었는데, 재미만 있다면 시간이 대수일까. 파이널 컷이 그 정도 분량이었다고 듣기는 했는데…… 물론 제작사가 그런 걸 허락해 줄리가 없겠지.

할렐루야.


덧글

  • 진사야 2009/03/09 08:48 # 삭제 답글

    마지막 줄에 동의합니다. "좀 더 고민하고,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은 다음에 어떤 표를 살지 선택할 필요가 있다." 정말 사전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영화 같습니다.
    저도 3시간 버전의 왓치맨은 어떨지 궁금한데... 제작사가 승인을 해줬을지는 의문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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