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글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LONG WALK

   석봉 어머니 떡썰기의 전설로 등극하시던 시절 만큼은 아니라 해도, 좋은 글씨 ─ 잘 쓴 글씨는 여전히 중요한 미덕이자 실생활에 도움 되는 기술 중의 하나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아날로그든 디지탈이든 간에 거의 모든 문자가 사람 아닌 것의 손을 빌려 기록되고 읽히는 요즘 세상이기는 하나, 어떤 면에선 그렇기 때문에 직접 쓴 손글씨가 더욱 가치있게 여겨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우리는 좋은 글씨를 쓰도록 교육받았으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여길까요? 자신이 쓴 글을 평생 혼자서만 읽고 또 읽으며 정신적 자위나 하려는 것이 아닌 바에야, 글이란 것은 나 이외의 다른 누군가가 독자로서의 권리와 소임을 다 하리라는 전제를 두고 쓰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글씨란 손을 통해 보여주는 글쓴이의 외모인 셈입니다. 여기서의 '외모'란 타고난 용모라기보다는 때와 장소에 맞는 옷차림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바람 참 잘 통할 듯한 허름한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 걸치고 머리는 커녕 세수조차 안 한 티가 나는 부스스한 얼굴로 격식을 요하는 중요한 회담에 참석한다든가, 두께가 몇 미리쯤 될 것 같은 짙은 화장을 하고 노출까지 심한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채로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낸다든가 한다면 그 생김새가 장동건이나 고소영 씨 뺨을 왕복으로 후려칠 수 있을 법한 수준이라 해도 좋은 소리 듣기는 어렵겠지요.
   말끔하고 정갈한 서체는 그 자체만으로 필자가 지니고 있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 예의 같은 것들을 여실히 드러내어 보여주는 근거가 됩니다. 반대의 경우, 흔히 말하는 악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테고 말입니다.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하고 나면 나름대로 합리적이기는 한데 순순히 따라주기는 참 싫은 이유로 자필 레포트를 고집하시는 교수님에게서 수업을 듣는다거나 군대에서 답장 기다리다 전역할 기세인 군사우편을 통해 편지를 주고 받거나 하지 않는 이상 직접 손으로 장문의 글을 쓰거나 또는 그런 것을 읽어보기가 동네 슈퍼 다녀오는 길에 현역 아이돌과 마주쳐서 맨 얼굴 목격하기 만큼이나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기는 합니다만, 사실 본질적인 부분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광대한 네트 속을 거닐다 보면, 그리 적지만은 않은 확률로 당혹스러운 상황과 맞닥뜨리곤 합니다.
   글씨의 색깔과 전혀 어울리지를 않아 계속 보고 있다가는 피카츄 백만 볼트의 삼색 발광처럼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화려한 배경색이라든가, 너무 심하게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잔가지가 잔뜩 붙어 있어 어딘가의 상형 문자처럼 보일 지경인 기묘한 폰트라든가, 글자의 색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글의 절반 이상을 알록달록한 빛깔 속으로 감추어버리는 커다란 그림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글이란 그것을 읽을 다른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쓰이는 것이 기본입니다.

   물론 자신의 글을 어떻게 꾸밀 것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이긴 합니다. 그러나 자유도 지나치면 여러 모로 해악이 되는 법입니다. 내용이 아닌 그 형태만으로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글이란, 죄악이나 다름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이야기꾼으로서의 본능과 욕망에 대해 의욕은 충만하되 제대로 된 결과를 보장해주기엔 어설픈 구석이 너무 많은 미적 감각이 저지르는 범죄입니다.

  어느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의 글을 어떠한 어조로 전달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비중을 두고, 꼭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의 글을 담는 포스팅의 가독성 또한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게 개그.
  이게 다 이글루스 때문입니다. 이글루스를 탓하세요.

덧글

  • 누에나방 2010/07/03 03:26 # 답글

    그러고보니 너님은 전엔 블로그에 검정색 배경에 흰색글씨 스킨을 사용하는 만행을 저지른 바가 있지...(...)
  • 달리는 바위 2010/07/03 04:04 #

    검정 배경에 회색 글씨에 비한다면야……
  • 슬랙 2010/07/15 11:54 # 답글

    뻘글인데 달리는바위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애니메이션 카우보이비밥에서 들었네요 ㅋ
  • 달리는 바위 2010/07/15 12:06 #

    그렇기도 하고, 다른 뜻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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